Seth Mountain(이산) 공연 관람
한받의 페북에서 공연 소식을 봤다. 세스 마틴Seth Martin(세스 마운틴, 또는 이산)에 대해 약간 알아보고 조금 들어 본 후 찾아갔다. 만유인력은 가 봐야지 가 봐야지 하다가 결국 안 가본 채로 서점으로서의 운영이 종료되었고, 지금은 공연 등 커뮤니티 공간으로 사용하는 모양. 아현역에서 내려 걸었다. 만리재 주변의 풍경은 언제나 만감이 교차하게 만든다(마음이 찢어짐). 도착하고 시간이 조금 떠서 근방 이름 없는 공원에서 잠깐 쉬었다. 좋은 공원이었다.
공연에 앞서 세스의 간략한 인생역정을 듣는 시간이 있었다. (영어에 능통하지 못해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세스는 700명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오레곤의 한촌 출신. 목사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한국과의 인연은 부모님 덕분. 대학에 다니며 좌경화되었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음악가-활동가 생활. 한국에서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우디 거스리의 강한 영향. 아메리칸 포크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 참여적인 가사를 쓰는 좌파포크싱어송라이터...
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영어로 그런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고 싶지는 않았다. 제대로 물을 능력도 없고... 여하간 그는 적절한 대답을 할 것이다. 그보다는 그의 활동이 나에게는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굳이 적을 필요 없을 것. 찾아보니 한국의 민요를 포크 스타일로 연주하기도 했던데, 한국에서 민요의 위상에 대해 그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역시 궁금해지면서, 또한 그것(한국-민요)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런 것들을 직접 확인하러 가 본 것 같기도 하다. 뭐가 아니라면 왜 아닌지, 뭐가 맞다면 왜 맞는지. 이런 일들이란 게 다 뭣들을 하고 있는 일들인지...
만약에 우리가 네 명이나 다섯 명에게, 또는 두 명 한 명에게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면, 누구에게 노래할 것이며 무슨 노래를 할 것인가?
그가 이번 공연에서 부른 노래들은 모두 오래된 곡조에 가사를 바꿔 붙인 것들이라고 한다. 노래하는 동안 그 가사와 번역이 벽에 영사되었다. 그야말로 포크송의 그야말로 대량의 가사를 뜻도 모른 채 듣고 있어야 한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나... 하는 단순한 문제를 넘어서, 개사라는 유구한 방식 특유의 유구함(고루함?)이 번역과 읽기라는 필터를 통과하며 묘해지는 것, 그 일의 부족한 복잡성이 충족되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고 어디서든 흔치 않은 경험. 무엇은 맥락으로부터 송두리째 뽑혀 버리면서 비로소 자신의 형상을 갖춘다. 그가 한국-민요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이해되는 일이 단순해지기가 아닌 복잡해지기인 까닭은 구체적인 것만이 추상적인 것을 운반할 수 있기 때문. (외재하는 것들의 폭풍으로부터 내재하는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경계선이 필요하다.)
무엇의 내용이나 핵심은 메시지라고 범박히 여겨지지만 그것은 수용자의 착시이며, 메시지(수용 가능한 해석틀)라는 외양 너머에 형식이 도사리고 있고, 그것이 바로 핵심이며, 보존되는 것이며, 감관에 도착하는 것이다. 비언어적이라는 뜻에서, '공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공통-감각되지만 동일-감각되지는 않는 실체로서. 그것이 무정한 세계와 구분되는 까닭은 공유되려는 것 그 자체인 언어(메시지)의 그물 위(영혼이라 불리는)에만 올려지기 때문이고, 그것이 보존되는 까닭은 실체로서 질량을 갖춘 채 영혼과는 무관하게 세계의 기울기를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때문...
노래 중간중간 그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 역시 좋았다. 아메리카 원주민 무덤과 송유관, 피트 시거가 부른 아리랑, 고등학교 때 마을에 찾아온 모병관, 이라크전에 파병됐다가 돌아와 자살한 친구들, 에릭 가너 이야기, 한국전에 참전한 유타 필립스의 노래와 그 커버... 나도 어쨌건 대충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것을 보며 참 노련하다고 생각. 노래하기-말하기의 교차라는 형식은 말할 것도 없이 예배적인 것(또는 공연으로서의 예배). 역시 노련하게 싱얼롱 유도를 하기에 싱얼롱했다. 좋은 시간이었다. 그의 음반과 시집 중에 시집을 샀고 투썸즈업을 해줬다.
공연에 앞서 세스의 간략한 인생역정을 듣는 시간이 있었다. (영어에 능통하지 못해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세스는 700명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오레곤의 한촌 출신. 목사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한국과의 인연은 부모님 덕분. 대학에 다니며 좌경화되었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음악가-활동가 생활. 한국에서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우디 거스리의 강한 영향. 아메리칸 포크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 참여적인 가사를 쓰는 좌파포크싱어송라이터...
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영어로 그런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고 싶지는 않았다. 제대로 물을 능력도 없고... 여하간 그는 적절한 대답을 할 것이다. 그보다는 그의 활동이 나에게는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굳이 적을 필요 없을 것. 찾아보니 한국의 민요를 포크 스타일로 연주하기도 했던데, 한국에서 민요의 위상에 대해 그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역시 궁금해지면서, 또한 그것(한국-민요)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런 것들을 직접 확인하러 가 본 것 같기도 하다. 뭐가 아니라면 왜 아닌지, 뭐가 맞다면 왜 맞는지. 이런 일들이란 게 다 뭣들을 하고 있는 일들인지...
만약에 우리가 네 명이나 다섯 명에게, 또는 두 명 한 명에게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면, 누구에게 노래할 것이며 무슨 노래를 할 것인가?
그가 이번 공연에서 부른 노래들은 모두 오래된 곡조에 가사를 바꿔 붙인 것들이라고 한다. 노래하는 동안 그 가사와 번역이 벽에 영사되었다. 그야말로 포크송의 그야말로 대량의 가사를 뜻도 모른 채 듣고 있어야 한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나... 하는 단순한 문제를 넘어서, 개사라는 유구한 방식 특유의 유구함(고루함?)이 번역과 읽기라는 필터를 통과하며 묘해지는 것, 그 일의 부족한 복잡성이 충족되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고 어디서든 흔치 않은 경험. 무엇은 맥락으로부터 송두리째 뽑혀 버리면서 비로소 자신의 형상을 갖춘다. 그가 한국-민요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이해되는 일이 단순해지기가 아닌 복잡해지기인 까닭은 구체적인 것만이 추상적인 것을 운반할 수 있기 때문. (외재하는 것들의 폭풍으로부터 내재하는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경계선이 필요하다.)
무엇의 내용이나 핵심은 메시지라고 범박히 여겨지지만 그것은 수용자의 착시이며, 메시지(수용 가능한 해석틀)라는 외양 너머에 형식이 도사리고 있고, 그것이 바로 핵심이며, 보존되는 것이며, 감관에 도착하는 것이다. 비언어적이라는 뜻에서, '공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공통-감각되지만 동일-감각되지는 않는 실체로서. 그것이 무정한 세계와 구분되는 까닭은 공유되려는 것 그 자체인 언어(메시지)의 그물 위(영혼이라 불리는)에만 올려지기 때문이고, 그것이 보존되는 까닭은 실체로서 질량을 갖춘 채 영혼과는 무관하게 세계의 기울기를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때문...
노래 중간중간 그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 역시 좋았다. 아메리카 원주민 무덤과 송유관, 피트 시거가 부른 아리랑, 고등학교 때 마을에 찾아온 모병관, 이라크전에 파병됐다가 돌아와 자살한 친구들, 에릭 가너 이야기, 한국전에 참전한 유타 필립스의 노래와 그 커버... 나도 어쨌건 대충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것을 보며 참 노련하다고 생각. 노래하기-말하기의 교차라는 형식은 말할 것도 없이 예배적인 것(또는 공연으로서의 예배). 역시 노련하게 싱얼롱 유도를 하기에 싱얼롱했다. 좋은 시간이었다. 그의 음반과 시집 중에 시집을 샀고 투썸즈업을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