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직전 메모

사랑을 노래하지 않기, 희망을 노래하지 않기, 평화를 노래하지 않기... 그런 것은 이상한 이야기다. 아직 노래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종류의 사랑, 희망, 평화를 노래하기. 그 역시 이상한 이야기다. 노래된 적 없는 감정을 노래하기... 감정은 원래 노래와 관련이 없다. 노래는 노래와 관련이 있다. 노래는 노래 듣기와 노래하기 사이의 커다란 간격과 가장 크게 관련이 있다. 노래로부터 노래 아닌 다른 것을 찾으려는 것은 노래 듣는 이들의 일이다. 이상하게도... 노래를 부를 때에 '나의 노래' 같은 것은 없다. 너의 노래뿐이다. 노래는 오로지 너, 노래에 바쳐진 노래뿐이다.

관객이 음수인 공연(유령 객석; 가장 익숙한 형식). 환청 듣고 환시 보기. 그 조건은 배경의 어둠, 이동 광원(또는 고정 광원 주변에서 머리 흔들기), 배경음, 공명음, 리듬과 안티리듬, 예민한 각성 상태, 피로함이다. 유령 관객은 휙휙 지나가고 옆에 왔다가 사라진다. 서 있다가 가고 갔다가 온다. 말을 하거나 소리를 치거나 코러스를 넣는다. 이토록 간단한, 이것이 바로 나라가 허락한 마약이냐? 조건만 갖추면 그 일은 실내에서도 일어난다. (유령 객석 앞에서) 노래하는 이는 환경에 영향을 가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자신의 감각 혼란과 거기 붙들리는 대상 되기를 꾀하는 이다. 오로지 실재하는 관객만이 이러한 사태를 제압할 수 있다.

트레이닝_필드. 방송을 트는 때가 있고 안 트는 때가 있다. 안 트는 때가 많다. 안 틀면 훈련에 가까워지고 틀면 즉흥에 가까워진다. 즉흥은 의식(또는 기억)으로서의 악보(또는 악보로서의 기억)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일깨운다는 점에서 끔찍한 면이 있다. 뭐하러 훈련을 하려 드는가? 뭐하러 기억을 시키려는가? 훈련 없이는 즉흥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흥에서는 전능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실은 내가 그 정도로 훈련된 자기반응기계에 가까워졌다는 점을 뜻할 뿐이다. 또는, 반응기계야말로 전능한 것이다. 밝은 방의 거울, 일테면 옛날 강의실의 커다란 창문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졌던 것(그리고 나 자신을 최대로 손에 넣었던 것)과는 반대로. 또는 똑같이. 기록광인 나와 반달족인 나. 그들은 모두 행위의 유일무이성으로부터 만족을 구하고, 서로를 통해서만 그 유일무이성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다 허튼소리다, 말장난이다.

실재의 관객이 있는 동안에는-

개량성가대/극좌반주대.

죄 지은 이들의 노래를 다시 부르기. 가수의 목소리를 뒤집어쓴 불쌍한 노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