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

함께 투쟁가를 부르기 전의 구령 선창. 외국에서도 그 단어를 이런 뜻으로 쓰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지까지는 배운 게 없다. 무슨 정파에 속한 것도 아니었고. 그보다는 쟁가를 부를 일 자체가 별로 많지 않았다. 몇 곡 배우기도 겨우 했다. 배우면서도 스스로 꼴이 우스웠는데, 그때 같이 배웠던 모두가 어느 정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아마 노래를 가르쳐 준 선배마저도. 왜 이딴 걸 배우고 있는 걸까... 되도 않을... 우스운.... 나는 민요를 배우듯이 노래들을 배웠다. 민요는 우습다. 우스운 것을 부르려는 것이다. 우스운 것을 배워서. 대학 시절 내내 그 비슷한 종류의 패배감, 또는 펑크감에 짓눌려 있었다. 이런 얘기가 이미 10년도 더 지난 얘기다. '이런 얘기가 벌써...' 운운하는 소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 놀랍다. 하여튼 지금은 아니다. 나는 옛일은 거의 잊었다. 지금은 예전보다 더 이해하고 있다. 뭘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더욱 이해하고 있다. 여러 일들이 있었다.

이것은 꽃종이의 예감, 내가 외쳐본 적 없는 아지에 대한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를 때는 1만이나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런 일은 없으리란 점까지 함께.

그대는 여러분 중 한 명이 아니고, 여러분이 아니며, 여러분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대는 누군가가 아니다. 그대가 내가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그대는 사람이 아니다. 그대는 생물도 신도 아니다. 그대는 장소가 아니고 그대는 시기가 아니다. 그대는 그 모든 것인 어떤 것이 아니다. 그대는 분명하게 특정되어 있다. 그대는 있었던 적이 없지만 기억해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그대는 하나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