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 선생님 주마등 재생력
고등학생 때였다.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 영상을 처음 보고서 기타를 배우기로 작정했다. 시원하게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나도 그런 즐겁고 시끄러운 일을 좀 해보고 싶었다. 수능을 치르자마자 밴드부에 있던 친구 DS에게 쓰레기나 다름없는 통기타로 교습을 받았다. DS는 엉성하게 가제본된 청록색 교습 책을 줬다. 맨 첫 페이지에 있던 노래는 등대지기였다. 아일랜드인지 어딘지 하는 곳의 민요 곡조에 미국 사람들이 가사를 붙여 찬송가로 부르던 노래인데 일본으로 간 미국 선교사가 일본 사람들에게 가르쳐 놓으니 등대 어쩌고 하는 걸로 개사를 해 버렸고, 그걸 일본으로 유학 갔던 한국 사람 누군가가 해방 후에 들여오며 또 한국어로 번안을 한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원래 아일랜드 민요라고는 하는데 아일랜드 사람들이 어디서 듣고 왔을지 그건 또 모르는 일이다. 그냥 대충 거기부터 시작한 걸로 되어 있다. 내 생각에, 노래에는 바로 그런 부분이 있어야 한다. 질리도록 부른 다음에 바꿔서 더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원래나 처음이 뭐였는지도 알 수 없게 될 정도로. 나는 다음과 같은 처음들을 기억한다.
새내기 시절, 만취한 동기가 선배의 방에서 자다가 누운 채로 토를 한 적이 있었다. 역시 그 옆에서 만취한 채 자다가 깬 나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선배들이 토사물을 치우는 동안 마침 방에 있던 기타를 잡아 쳤다. 가만히 있기는 뭐했던 것이다. 누워 토를 하고서도 깨어나지 않은 나의 동기를 구석에 밀어놓고 우리는 돌아가며 기타를 쳤다. 김광석 같은 것을 낄낄대며, 일어나 일어나 하면서. 그 일을 계기로 기타 좋아하는 선배 SH와 친해져서는 학생회실에 모여 누구 것인지도 모를 통기타를 맨날 쳐댔다. 그렇게 치고 있자니 그 전까지 말도 나눈 적 없는 동기 HW가 와서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메탈리카를 쳐줬다. 우리는 와아, 했었다. 거기서 세 명이 모이고 네 명이 모이다 수개월 뒤, 학과 동아리에서 교내 전시장을 빌려 하는 행사의 오프닝으로 앰프와 드럼을 가져다 놓고 너바나 따위를 커버했던 것이 첫 공연이었다.
노래를 처음 만든 건 군대에서였다. 함께 기타를 치던 선임병 MG가 어느 날 내게 코드 진행을 만들어 보라 했다. 우리는 매일 저녁 매일 같은 곡을 질리도록 쳐댄 상태였다. 일테면 데파페페를. 더는 지겨워서 못 칠 정도였으므로, 내가 새로운 진행을 만들면 자신이 리드 기타로서 뭔가를 보여 주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싸한 이야기라 나는 혼자 별 볼 일 없는 진행을 만들었다. 이 코드 다음에 이 코드가 나오면 좋겠다, 여기서 쟝쟝 여기서 꽝꽝 하면 좋겠다, 하면서. 그리고는 선임에게 들려주지 않은 채 혼자서 가락과 가사를 붙였다. 노래 만들어 부르기는 제법 어려운 일이었지만 보통 재밌는 일이 아니었다. 군대에서 시간 보내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없었다. 나는 전역을 앞둔 선임을 버려둔 채 내 노래만 했다. 퇴근한 포대장의 집무실에 혼자 들어가, 대포가 어쩌고 하는 노래를. 그것은 남의 노래를 부르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취미 세계로의 진입이었다.
전역 후에는 음악애호가인 선배 SU와 룸메이트로 살면서 그가 트는 음악을 들으며 취향을 개조당했다. 그 방에 여러 사람을 불러 각자의 자작곡을 불렀던 송년회는 특별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 노래로 처음 공연을 한 것은 학과 축제 강의실 파티에서였다. 그때의 초대 가수였던 인디뮤지션 한받이 자신의 음반 행상에 초대해 처음으로 길거리에서 불러보기도 했다. 졸업을 한 SU가 어느 날 노래를 녹음하자며 서울로 불러 휴일 초등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녹음을 했고, 그 녹음 파일을 그냥 갖고 있기만은 재미없어 트위터로 물물교환 이벤트를 했다. 30분 이상 공을 들여 만든 것이라면 무엇과도 교환했다. 잼, 차, 향, 책, 글, 사진, 그림 등을 받고 음원파일을 줬다. 그리고 곧 스마트폰을 갖게 되어 그걸로 혼자 녹음해 앨범 같은 것을 묶어 아무나 다운받을 수 있게 하고 또 공연을 몇 번 하고... 이런 이야기는 별 재미가 없다. 왜 이런 얘기를 한담?
기타는 어디에나 있고 기타를 치는 사람도 어디에나 있다. 내 기타 선생님들은 여전히 기타를 칠 줄 안다. 선생님들은 나한테 조금씩 가르쳤다. 죽은 선생님과 산 선생님, 만날 수 있는 선생님과 만날 수 없는 선생님이 있다. 나도 기타를 조금씩 가르친다. 기회가 닿는 대로 아무한테나. 죽은 학생과 산 학생, 만날 수 있는 학생과 만날 수 없는 학생이 있다. 나는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오래된 코드를 오래된 순서로 깔고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가락을 가사에 붙여 부르면 그만이다. 이걸로 뭘 이루겠다거나 하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내 노래를 그저 두어 명이 들어 주면 좋고, 불러 주면 더 좋다. 물론 내가 부르는 게 가장 좋다. 그 정도면 된다. 그것은 더하고 덜 것이 없는 나의 신성한 취미다. 노동이 없으면 생활도 없는 것과 같이, 취미가 없으면 노동도 없다.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자인 송해는 힘들 때 노래만큼 위로가 되는 것이 없다고, 노래를 많이 부르라고 했다. 약간 슬픈 이야기이긴 하다. 전국도 노래도 자랑도 송해도. 기타는 많이 칠수록 좋고 노래는 지칠 때까지 불러야 좋다. 내 생각에, 노래는 말의 부족분을 가락으로 채우려는 일이다. 모두의 언어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노래를 이어서 부른다. 모두의 문법과 사전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말은 우리가 닿으려는 것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의 말을 하기에는 목구멍이 한 개라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우리가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영혼이 한 사람에 하나씩인 것이 억울한 일이라서, 우리는 서로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 아직 겪어본 적 없는 끝이 떠오를 정도로.
(월간 시인동네 17년 7월호)
새내기 시절, 만취한 동기가 선배의 방에서 자다가 누운 채로 토를 한 적이 있었다. 역시 그 옆에서 만취한 채 자다가 깬 나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선배들이 토사물을 치우는 동안 마침 방에 있던 기타를 잡아 쳤다. 가만히 있기는 뭐했던 것이다. 누워 토를 하고서도 깨어나지 않은 나의 동기를 구석에 밀어놓고 우리는 돌아가며 기타를 쳤다. 김광석 같은 것을 낄낄대며, 일어나 일어나 하면서. 그 일을 계기로 기타 좋아하는 선배 SH와 친해져서는 학생회실에 모여 누구 것인지도 모를 통기타를 맨날 쳐댔다. 그렇게 치고 있자니 그 전까지 말도 나눈 적 없는 동기 HW가 와서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메탈리카를 쳐줬다. 우리는 와아, 했었다. 거기서 세 명이 모이고 네 명이 모이다 수개월 뒤, 학과 동아리에서 교내 전시장을 빌려 하는 행사의 오프닝으로 앰프와 드럼을 가져다 놓고 너바나 따위를 커버했던 것이 첫 공연이었다.
노래를 처음 만든 건 군대에서였다. 함께 기타를 치던 선임병 MG가 어느 날 내게 코드 진행을 만들어 보라 했다. 우리는 매일 저녁 매일 같은 곡을 질리도록 쳐댄 상태였다. 일테면 데파페페를. 더는 지겨워서 못 칠 정도였으므로, 내가 새로운 진행을 만들면 자신이 리드 기타로서 뭔가를 보여 주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싸한 이야기라 나는 혼자 별 볼 일 없는 진행을 만들었다. 이 코드 다음에 이 코드가 나오면 좋겠다, 여기서 쟝쟝 여기서 꽝꽝 하면 좋겠다, 하면서. 그리고는 선임에게 들려주지 않은 채 혼자서 가락과 가사를 붙였다. 노래 만들어 부르기는 제법 어려운 일이었지만 보통 재밌는 일이 아니었다. 군대에서 시간 보내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없었다. 나는 전역을 앞둔 선임을 버려둔 채 내 노래만 했다. 퇴근한 포대장의 집무실에 혼자 들어가, 대포가 어쩌고 하는 노래를. 그것은 남의 노래를 부르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취미 세계로의 진입이었다.
전역 후에는 음악애호가인 선배 SU와 룸메이트로 살면서 그가 트는 음악을 들으며 취향을 개조당했다. 그 방에 여러 사람을 불러 각자의 자작곡을 불렀던 송년회는 특별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 노래로 처음 공연을 한 것은 학과 축제 강의실 파티에서였다. 그때의 초대 가수였던 인디뮤지션 한받이 자신의 음반 행상에 초대해 처음으로 길거리에서 불러보기도 했다. 졸업을 한 SU가 어느 날 노래를 녹음하자며 서울로 불러 휴일 초등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녹음을 했고, 그 녹음 파일을 그냥 갖고 있기만은 재미없어 트위터로 물물교환 이벤트를 했다. 30분 이상 공을 들여 만든 것이라면 무엇과도 교환했다. 잼, 차, 향, 책, 글, 사진, 그림 등을 받고 음원파일을 줬다. 그리고 곧 스마트폰을 갖게 되어 그걸로 혼자 녹음해 앨범 같은 것을 묶어 아무나 다운받을 수 있게 하고 또 공연을 몇 번 하고... 이런 이야기는 별 재미가 없다. 왜 이런 얘기를 한담?
기타는 어디에나 있고 기타를 치는 사람도 어디에나 있다. 내 기타 선생님들은 여전히 기타를 칠 줄 안다. 선생님들은 나한테 조금씩 가르쳤다. 죽은 선생님과 산 선생님, 만날 수 있는 선생님과 만날 수 없는 선생님이 있다. 나도 기타를 조금씩 가르친다. 기회가 닿는 대로 아무한테나. 죽은 학생과 산 학생, 만날 수 있는 학생과 만날 수 없는 학생이 있다. 나는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오래된 코드를 오래된 순서로 깔고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가락을 가사에 붙여 부르면 그만이다. 이걸로 뭘 이루겠다거나 하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내 노래를 그저 두어 명이 들어 주면 좋고, 불러 주면 더 좋다. 물론 내가 부르는 게 가장 좋다. 그 정도면 된다. 그것은 더하고 덜 것이 없는 나의 신성한 취미다. 노동이 없으면 생활도 없는 것과 같이, 취미가 없으면 노동도 없다.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자인 송해는 힘들 때 노래만큼 위로가 되는 것이 없다고, 노래를 많이 부르라고 했다. 약간 슬픈 이야기이긴 하다. 전국도 노래도 자랑도 송해도. 기타는 많이 칠수록 좋고 노래는 지칠 때까지 불러야 좋다. 내 생각에, 노래는 말의 부족분을 가락으로 채우려는 일이다. 모두의 언어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노래를 이어서 부른다. 모두의 문법과 사전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말은 우리가 닿으려는 것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의 말을 하기에는 목구멍이 한 개라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우리가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영혼이 한 사람에 하나씩인 것이 억울한 일이라서, 우리는 서로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 아직 겪어본 적 없는 끝이 떠오를 정도로.
(월간 시인동네 17년 7월호)